기다리던 <오펜하이머>를 드디어




미국의 물리학자이자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의 전기영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를 보고 왔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을 이끈 장본인이지만 전후에는 원자폭탄 개발 프로그램을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왜 오펜하이머는 입장을 바꾸게 되었을까? 원자폭탄의 대량 살상력과 비윤리성에 대해 개발 단계에서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실제 사용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후회했을까? 1936년 32세의 나이로 UC 버클리에서 첫 교수직을 맡은 뒤 6년 후 1942년 맨하탄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된 오펜하이머의 나이는 38세였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세계 최정상급의 연구자이자 유명인이 된 오펜하이머는, 권위와 권력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전후에 정치적 흐름과 반대되는 길로 나아갔는가?

놀란은 <오펜하이머>를 통해 이런 질문에 대해 대답한다. 대답보다는 오펜하이머에 대한 놀란의 개인적 평가와 존경의 표현으로 보이기도 한다. <오펜하이머>는 더 나아가 양자역학이 태동하던 시기의 물리학계 전반에 대한 존경과 동경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마지막 신에서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순수한 밀담과, 그것을 바라보는 스트라우스의 의심스럽고 옹졸한 눈빛으로 놀란은 자신의 평가를 내비친다.


인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프로메테우스적인 발견을 세계에 가져왔음에도 조금도 세계를 바꿀 수 없는 아이러니. 영화는 이 점을 봐 달라고, 오펜하이머를 다시 평가해달라고 호소한다. 세계의 미래라는 거대한 과제를 짊어진 오펜하이머는 ‘악’이라기보다 ‘무력’ 그 자체에 가까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발명품이 세계에 가져다 준 여파를 회상하며 괴로워하는 오펜하이머 대신 그를 둘러싼 세계가 흔들리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놀란 감독은 이번에도 특이한 플롯을 선보인다. 1) 실제 일어난 사건 2) 오펜하이머와 주변 인물을 대상으로 한 취조 장면 3) 흑백으로 표현되는 루이스 스트라우스의 관점을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각각은 오펜하이머의 객관적인 삶의 궤적, 주변인에 의한 오펜하이머의 평가, 반대 진영의 비판을 대변한다. 일반적인 전기 영화라면 실제 사건을 위주로 시간 순으로 진행하는 것이 제일 안전하겠지만, <오펜하이머>에서는 1, 2, 3을 속도감 있게 뒤섞는다. 실제 러닝 타임이나 비중으로 보더라도 어느 한 편이 우세하지 않다. 관람 전에는 트리니티 실험에서 클라이막스에 도달해 빠르게 하강하는 구조를 예상했었는데, 실제 관람할 때는 트리니티 실험이 딱 절반 지점인 느낌이었다. 그만큼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를 ‘원폭의 아버지’라는 소개로 일축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감독의 신념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에는 인물에 대한 객관적 서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담겼다. 객관적인 서술이 과연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인가? 놀란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세계의 거대한 흐름과,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뒤흔든 양자역학의 등장, 심화되기 시작한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을 하이젠베르크, 그로브 장군, 텔러, 공산주의자였던 전 연인 진 등 인물 간의 역학을 통해 표현했다. 3시간 넘는 러닝타임과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많은 대사량에도 역동성을 잃지 않는 영화였다. 장황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지루하다는 말은 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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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위어 Andy Weir – 프로젝트 헤일메리 Project Hail Mary

– 앤디 위어의 소설은 황당할정도로 낙관적이며 끈기있고 용감한 과학자를 내세운다. 그래서 위어의 소설을 읽을 때 나는 마블 영화를 볼 때처럼 행복해진다.

– 내가 읽는 책의 95퍼센트는 우울하거나 어두운 책이다. 주인공은 보통 삶에 대한 씁쓸한 태도를 취한다. 인격이나 성숙함에 결함이 있지만 삶과 세상에 대해 과할 정도로 관조적이고 비관적이며 인간 군상에 대한 조소를 숨기면서 살아간다. 이언 매큐언, 줄리언 반스의 캐릭터들이 그렇다.

– 슬퍼지기 위해 또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유를 정확히 짚을 수 없는 사람의 감정과 고뇌와 욕망을 작가의 예민한 관찰력과 유려한 문장을 통해 설명받고 싶어서 소설을 읽는다.

– 취향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읽어본 소설에서 주인공이 낙천적인 경우는 정말 드물다. 라이트한 연애 소설이 아니고서야.

-내가 몇 페이지 내에 포기해버리는 종류의 주인공은 어리숙하거나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이다.

– 그런 의미에서 그레이스 박사는 너무나 독특하다. 정체모를 공간에서 시체가 된 동료 두명 사이에서 깨어났는데도 패닉하지 않는 낙천성을 지녔고, 자신감은 부족할지언정 자존감까지 부족하지 않으며(박사학위를 받고 중학교 교사가 되지만, 브레이킹배드의 월터 화이트처럼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도전에 아이처럼 흥분하고 끈기도 대단한 인간적인 슈퍼영웅이다.

– 외딴 항성계에서 외계인과 만나다니. 직접 접선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 별의 운명을 구하기 위한 간항성적 팀웍을 보여주다니!

– 수많은 물리 지식이 들어있다. 작가가 평소에 양자역학과 상대론 매니아였다고 하지만 여러 자문을 거쳤을 수고가 감동적이다. 그 지식을 배경지식 없는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하다. 내년에 개봉할 동명의 영화도, 위어의 차기작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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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을 보고 짧게 적어보는 글


  • (역시나) 스타일리쉬하고 아름다운 영화. 스타일뿐만 아니라 플롯과 이야기까지 좋았다. 운명이라는 산과 감정이라는 파도 앞에 나약하기 그지 없는 눈먼 인간의 사랑이야기로 봤다.

  • 지금까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크게 좋아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영화를 위한 영화, 또는 영화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실험하려는 욕구가 지배적인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껍데기가 더 중요해서 공감할 수 없다고 해야 할까, 진정성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반면에 이번 영화는 형식보다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마음을 파고들었다. <헤어질 결심>은 인간 본연의 감정과 욕망을,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솔직하고 원초적이며 단단하게 표현하고 있다. 극중에 해준이 홍산오에게 건네는 “넌 죄가 없어. 사랑해서 죽인 거니까” 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대사는 <헤어질 결심>에서 다루는 사랑의 본질이다. 애처롭고 멍청한, 이성과 도덕이 작동하지 않는 눈먼 사랑.

  • 어눌한 한국어, 휴대폰 메시지, 번역기라는 장막을 거쳐 전달되는 날것의 메시지들에 매료됐다.
    “내 숨소리를 들어요. 내 숨에 당신 숨을 맞춰요. 이제 바다로 가요. 물로 들어가요. 당신은 해파리예요. 눈도 코도 없어요. 생각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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