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


내가 주방에서 혼자 일하고 있을 때면

남편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 표정에는 나만 아는 많은 감정이 들어있다

나는 괜히 메롱, 하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본다

그 표정도 너만이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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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쓰다


마음을 쓴다는 말이 좋다.

인생에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쓴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런 누군가는 인생에서 자주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쓰면 고통이 함께 찾아온다. 말그대로 내 마음을 함께 쓰기 때문이다.

좋아함은 거두면 된다. 다른 좋아하는 것으로 바꾸어도 된다. 하지만 한 번 쓴 마음은 거둘 수 없다. 쓴 마음만큼 내 자신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을 쓰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존재해줘서 고맙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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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지도 지치지도 않았으면


관심있는 내용에 대해 말할 때 그의 모습은 천상 아이같다

사진에 대해 물리에 대해 F1에 대해 얘기할 때에는 꼭 다른 세계에 가 있는 것 같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과 흥분한 손 동작에 어린 아이같은 순수함이 보인다.
얘기가 길어지면 나는 어느새 그의 눈동자를 보고있다.

이 모습을 영원히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주변 사람들이, 주변 환경이 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삶의 과제들과 아빠라는 과업이 그를 지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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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이번엔 얼마나 걸릴까

가늠이나 해 봤으면 한다

그동안은

슬픈 노래에 마음을 떠맡기고

차가운 이성에 소원을 빌고

꼿꼿하게 견뎌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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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들러를 다루는 법


아이가 목욕을 하기 싫다고 떼쓰는 날

“목욕물에 풍덩 들어갈래, 아니면 엄마가 ICE처럼 빠르게 씻겨줄까?”

물으면 활짝 웃으며 ICE처럼 빠르게 씻고 싶다고 한다.

아이가 밥을 먹기 싫어하면 “여기 앰트랙 식당칸 같다~ 기차소리 들리는 것 같지 않아? 쿠궁쿠궁”

소리에 신나서 밥을 먹는다.

너에게 기차란 뭐냐…

*

아이는 수 개념을 잘 모른다.

열차가 일분 있다가 출발합니다!
열차가 30분 지연됐어요! 라는 말은 할 줄 알면서

케이크 위에 촛불이 2개인지 세개인지는 셀 줄 모른다.

귀여운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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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추워지면 남편은 한 솥씩 차를 끓인다. 메밀차, 보리차, 유자차, 한라봉차…

오늘은 일하는 내 책상 앞에 숭늉과 티스푼을 턱 하고 내려놓는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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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마음에 파도가 일어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오늘같은 날엔 바다에 가야 한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오프를 내고, 헤드폰만 가지고 보스턴 근처 해안가에 나갔다. 바다 가까이에 살아서 다행이다.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마음의 파도를 고스란히 느껴본다.

겨우 잔잔해진 물을 어떻게든 지키리라 그렇게도 다짐했는데, 작은 바람에 인 물결이 이렇게나 큰 파도가 되어 해안을 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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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소유의 종말


음악을 소유하지 않는 시대가 무르익었다. 오래 전부터 예측한 일이면서도 서운하다.

어려서부터 디지털 세상에 꽤 발빠르게 적응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트렌드에는 적응하기를 거부하고 싶다.

음악은 내 삶에 무척 중요한 존재다. 꽤 최근까지도 MP3 다운로드 서비스를 썼었다. 특정 시기에 들었던 음악을 기억하고 소유하고 싶어서다. 요즘은 스트리밍 재생리스트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지만 음악이 텍스트화된 기록들로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게 속상하다.

좋아요가 다운로드를 대체하게 되면서 좋은 음악의 무게도 줄어드는 느낌이다. 정말 고르고 골라서 내 취향에 맞는 음악을 소중하게 다운로드하고 음반을 샀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한 번 듣고 귀에 감기는 음악에 자주 좋아요를 누르게 된다. 그런 음악들에는 반드시 사용기한이 있다. 몇 달 뒤에 들으면 무심코 좋아요를 취소하게 되고 흔적 없이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요즘은 월별로 재생리스트를 만든다. 조금은 해결이 되는 느낌이지만 무의미한 숫자들과 함께 늘어나버리는 리스트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디지털 무소유주의자인 남편은 그게 요즘 음악 감상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순간적인 끌림으로 음악을 선택하고 지겨워지면 아무 미련없이 기억 저편으로 보내버리는 것. 그게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얄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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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어쩌면 이라는 단어가 싫어졌다

결국 하지도 않을 일이면서

불가능한 일도 아닌
그렇다고 현실도 아닌

무의미한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어쩌면이라는 단어가 아예 사라졌으면 한다

할 수 없다에 마침표를 찍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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