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see how it goes



아이가 부쩍 영어가 늘기 시작했다. 두돌 기점으로 언어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유치원에서 외국어를 습득하는 능력도 느는 모양이다.

하품을 하면서 “Yawn~~~” 이라는 영어 의성어를 쓰거나, “Excavator가 construction site 뚝딱뚝딱 공사하고 있어” 처럼 교포 말투를 구사하기도 한다.

“영어유치원 보내는 셈이네! 요즘 한국에선 애를 못 보내서 난리래!”라고 우스갯소리 하지만 실은 이럴 때마다 아이를 미국에서 키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나는 아이가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자란다는 게 무섭다. 아이가 형성해갈 다른 사고 체계와 문화적 토양이 부모 자식간의 거리감을 말하는 것 같아 속상하고,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느끼듯 이편도 저편도 아닌 것 같은 소속감의 혼란을 느낄까봐 걱정도 된다. 무엇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랄까봐 두렵다. 결국 이기적인 마음이다.

어서 한국에 돌아가자고 보채기에는 내 꿋꿋함도, 남편의 떳떳함도 지키고 싶기에 누굴 만나든 “Let’s see how it goes”를 말한다. 너무나 나답지 않은 말을 뻔뻔하게 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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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면 솔직한 마음을 보이게 된다.

나는 가끔은 그 점에 기대지만
대개는 술을 마시면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첫 직장에서 내가 있던 부서는 지금 생각하면 구식이었다. 새벽 두세시까지 술자리를 하다 아무도 없는 양재천을 건너 집에 들어가는 날이 많았으니까. 그땐 그게 사회라고, 커리어우먼이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너는 왜 안 취해? 빨리 더 마셔

따뜻한 줄 알았던 상사의 충혈된 눈이 기억난다.

멀쩡해보여서 열 받네?

주량이 자신의 무기였던 상사는 내 굴복을 원했다.

멀쩡한 게 아니었다. 정신을 놓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참았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술을 먹여 약점과 진심과 비밀을 알아내려고 한다. 맨 정신에는 마음을 움직일 힘도 없으면서. 그럴 용기와 언변도 없으면서. 그런 사람들을 나는 혐오한다.

다음날 아무일이 없었던 것처럼,
머리를 만지고 구두를 신고
안녕하십니까 밝게 웃으며 사무실에 들어섰던
그 날들이
한참 지난 지금에 와서야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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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 뭘까



오늘은 누가 날 좀 도와줬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인생에서 누가 날 도와주도록 허락해본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결국 내가 나를 돕지 못해서 하는 푸념이다.

자기를 잘 돌보는 사람이 부럽다.

나도 운동을 하면, 맛있는 것을 먹으면, 비싼 물건을 사면 힐링이 되는 사람이면 좋겠다.

못살게 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참한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무엇에 쫓기는지 모르겠다.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토들러와의 하루 때문이려나.

스스로에게 모질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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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



한쪽 매듭이 풀린 실이 자꾸 꼬인다
잡아당길수록 더 엉뚱하게 꼬인다

묶여있는 반대쪽 끝을 풀어보려 한다

왜 그렇게 단단히도 묶었는지 내 무딘 손톱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다

가위를 든다
그리고
이내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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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꿈



부모로서 우리의 꿈은 아이가 나중에 “엄마 아빠, 키워줘서 고생했습니다”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우린 너를 위해 희생한 게 없어, 우리를 성장시켜줘서 너에게 고마워”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갖기로 마음 먹었을 때 우리는 아이보다 우리의 행복을 우선시하자고 다짐했다.

아직까지 나는 아이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순한 기질의 아이 덕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까지 부담되고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임신 기간동안의 신체적 고통이 힘들었던 것 빼고는, 아이가 태어나고 내가 별로 손해를 본 것 같지 않다. 물론 육아는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아이가 주는 행복감을 거저 얻을 수는 없다.

언젠가 둘째를 갖고 싶을 수도 있다. 아이와의 하루가 순탄하게 지나가는 날에는 정말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한다.

우리의 판단 기준은 아마, 둘째가 생겨도 “우린 너희를 위해 희생한 게 없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둘째가 태어나도 출산 다음날 뛰어다니는 몸 상태가 될까. 바쁜 남편에게 눈 흘기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관계는 여전할까. 일은 계속 할 수 있을까. 내 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질투심이 많은 첫째에게 버럭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렸지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둘째는 아니야. 라고 한 마디로 일축하는 남편이 부럽고 짜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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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


우리는 결혼하기 전 몇 가지 다짐을 했다.

서로에 대해 늘 조심하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서로를 바꾸지 않기로 다짐했다.
서로의 결함을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증오하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뒷손이 없이 여기저기 불을 켜놓고 다니기 일쑤인 나를 고쳐주다 지친 남편은 이제 말없이 내가 켜놓은 불을 끈다.

머리를 빗고 다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부랴부랴 그냥 나가버리는 그를 설득하다 지친 나는 이제 말없이 그의 머리를 빗어준다.

우리는 서로를 바꿀 수 없다. 바뀌는 건 나다. 바뀌지 않는 너도 나에겐 귀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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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퍼탈

아이는 쉬운 단어를 배우기도 전에
“부퍼탈” 과 “베를린 우반 트레인”을 말했다.

나와 남편은 경쟁적으로 아이에게 취미를 공유(주입?)하려고 노력하는데 공사장 vs 기차 대결에서는 내가 승리했다.

이제 두 돌이 된 아이는 여섯 달째 기차 놀이에 푹 빠져있다. 매일 원목 트랙을 만들었다, 부수었다, 선로를 스위치했다, 사고를 냈다, 수습했다 하면서 온종일 종알댄다.

어렸을 때 나는 모델 트레인을 좋아했다. 조금 큰 아이였을 때라, 지금 아이가 가지고 노는 원목 트랙 말고 금속으로 된 미니어처 트레인을 갖고 싶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알 수 없는 유럽어로 된 기차 잡지를 어느 서점에서 몇 권 구했던 기억도 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기차 수집에도 도전하고 싶었었다(그러다 아쿠아라이프로 덕질을 전환하지만 않았더라도…).

요즘은 아이와 1,000개의 탈것 이름 외우기 챌린지를 하고 있다.
언젠가 아이가 크면 정말로 부퍼탈에 가서 현수식 열차를 타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함께 있을 때 지루하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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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기억


어떤 기억들은 절대 잊을 수 없다.

현재와의 관계가 없는 외딴 섬같은 기억으로
독립된 기억의 방에 자리한다.

이따금씩 나는 예고없이 그 방에 초대된다.
중앙에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릴들이 있다. 사면의 벽에는 각기 다른 흑백의 영상들이 재생된다. 보지 않을 방법은 없다. 나는 가만히 바닥에 웅크리다 멍하니 흑백의 영상을 보다가를 반복한다.

한동안은, 정말 한동안은 나가는 문이 보이지 않는다.

문이 희미하게 나타났을 때 나는 겨우 기어서 방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삶은 계속될 거라는 걸 안다. 언제나 그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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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


아이는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에 맞춰서 춤을 추는 걸 좋아한다. 베를린 필하모니커 발트뷔네 콘서트 영상을 보여준 다음부터였다. 쿵짝짝 쿵짝짝 리듬에 맞춰 앉았다 일어났다하며 빙글빙글 도는 게 무척 귀엽다.

남편은 아이와 놀 때 내가 재즈를 틀어놓는 걸 싫어한다. 예측할 수 없는 음을 아이가 듣는게 싫다고 한다. 슬픈 노래를 트는 것도 싫어한다. 아이에게 감정이 전이된다고 한다. 힙합도 싫어한다. 가사가 불경스럽다나. 그렇다고 메탈을 틀 수는 없으니 클래식으로 합의를 보기로 한다.

뽀로로 노래에 지친 내 귀는 누가 책임질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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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실격



요즘처럼 집중력이 떨어지고 잡생각이 많아지는 때에는
늘 불안불안하다.

어제도 멍청하게 거울을 보며 이를 닦고 있었다.
멀리서 ‘엄마 같이 화장실 들어가!’ 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쪼르르 들어온다.
개구지게 웃으면서 욕조로 들어간다.
욕조에 물기가 남아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이를 막지 않는다
아이가 첨벙첨벙 소리가 재미있는지 발을 동동 구른다.
위험한데, 저거 위험할 텐데… 알면서도 막지 않는다.
쾅 하는 소리가 들리고 아이가 자지러진다.
그때서야 현실로 돌아와보니 아이가 걷질 못한다.

오늘 진단을 받아보니 종아리뼈와 정강이뼈가 골절이다.
하루종일 동네 병원과 대학 병원을 왔다갔다하며 고생한 아이는
무던한 성격 탓인지 병원도 의사도 깁스도 모든 게 신기하기만 한 모양이다.
그 와중에 파란색 말고 초록색으로 감아달라고 한다.
“와! 다리가 엄청 단단해졌네! 그린 히어로네!” 하는 아빠의 말에 까르르 웃는다.

아이보다 내 행복을 우선시하겠다는 내 다짐이
이기적인 엄마가 되겠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그게 결국 같은 말이었나 싶어 어디 숨고만 싶다.

이런 날엔 엄마 실격 말고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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