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도둑, 나쁜 사람



할 줄 아는 욕이 없는 두 돌 반의 아기는

심한 장난을 치는 아빠에게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목소리로 호통을 치곤 한다.

“아빠는 도둑이야! 정말 나쁜 사람이야!!!! 늑대야! 늑대가 나타났다!”


이보다 더 귀여울 수 없는 순수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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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들러를 다루는 법


아이가 목욕을 하기 싫다고 떼쓰는 날

“목욕물에 풍덩 들어갈래, 아니면 엄마가 ICE처럼 빠르게 씻겨줄까?”

물으면 활짝 웃으며 ICE처럼 빠르게 씻고 싶다고 한다.

아이가 밥을 먹기 싫어하면 “여기 앰트랙 식당칸 같다~ 기차소리 들리는 것 같지 않아? 쿠궁쿠궁”

소리에 신나서 밥을 먹는다.

너에게 기차란 뭐냐…

*

아이는 수 개념을 잘 모른다.

열차가 일분 있다가 출발합니다!
열차가 30분 지연됐어요! 라는 말은 할 줄 알면서

케이크 위에 촛불이 2개인지 세개인지는 셀 줄 모른다.

귀여운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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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 see how it goes



아이가 부쩍 영어가 늘기 시작했다. 두돌 기점으로 언어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유치원에서 외국어를 습득하는 능력도 느는 모양이다.

하품을 하면서 “Yawn~~~” 이라는 영어 의성어를 쓰거나, “Excavator가 construction site 뚝딱뚝딱 공사하고 있어” 처럼 교포 말투를 구사하기도 한다.

“영어유치원 보내는 셈이네! 요즘 한국에선 애를 못 보내서 난리래!”라고 우스갯소리 하지만 실은 이럴 때마다 아이를 미국에서 키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나는 아이가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자란다는 게 무섭다. 아이가 형성해갈 다른 사고 체계와 문화적 토양이 부모 자식간의 거리감을 말하는 것 같아 속상하고,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느끼듯 이편도 저편도 아닌 것 같은 소속감의 혼란을 느낄까봐 걱정도 된다. 무엇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랄까봐 두렵다. 결국 이기적인 마음이다.

어서 한국에 돌아가자고 보채기에는 내 꿋꿋함도, 남편의 떳떳함도 지키고 싶기에 누굴 만나든 “Let’s see how it goes”를 말한다. 너무나 나답지 않은 말을 뻔뻔하게 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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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꿈



부모로서 우리의 꿈은 아이가 나중에 “엄마 아빠, 키워줘서 고생했습니다”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우린 너를 위해 희생한 게 없어, 우리를 성장시켜줘서 너에게 고마워”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갖기로 마음 먹었을 때 우리는 아이보다 우리의 행복을 우선시하자고 다짐했다.

아직까지 나는 아이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순한 기질의 아이 덕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까지 부담되고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임신 기간동안의 신체적 고통이 힘들었던 것 빼고는, 아이가 태어나고 내가 별로 손해를 본 것 같지 않다. 물론 육아는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아이가 주는 행복감을 거저 얻을 수는 없다.

언젠가 둘째를 갖고 싶을 수도 있다. 아이와의 하루가 순탄하게 지나가는 날에는 정말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한다.

우리의 판단 기준은 아마, 둘째가 생겨도 “우린 너희를 위해 희생한 게 없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둘째가 태어나도 출산 다음날 뛰어다니는 몸 상태가 될까. 바쁜 남편에게 눈 흘기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관계는 여전할까. 일은 계속 할 수 있을까. 내 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질투심이 많은 첫째에게 버럭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렸지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둘째는 아니야. 라고 한 마디로 일축하는 남편이 부럽고 짜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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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퍼탈

아이는 쉬운 단어를 배우기도 전에
“부퍼탈” 과 “베를린 우반 트레인”을 말했다.

나와 남편은 경쟁적으로 아이에게 취미를 공유(주입?)하려고 노력하는데 공사장 vs 기차 대결에서는 내가 승리했다.

이제 두 돌이 된 아이는 여섯 달째 기차 놀이에 푹 빠져있다. 매일 원목 트랙을 만들었다, 부수었다, 선로를 스위치했다, 사고를 냈다, 수습했다 하면서 온종일 종알댄다.

어렸을 때 나는 모델 트레인을 좋아했다. 조금 큰 아이였을 때라, 지금 아이가 가지고 노는 원목 트랙 말고 금속으로 된 미니어처 트레인을 갖고 싶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알 수 없는 유럽어로 된 기차 잡지를 어느 서점에서 몇 권 구했던 기억도 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기차 수집에도 도전하고 싶었었다(그러다 아쿠아라이프로 덕질을 전환하지만 않았더라도…).

요즘은 아이와 1,000개의 탈것 이름 외우기 챌린지를 하고 있다.
언젠가 아이가 크면 정말로 부퍼탈에 가서 현수식 열차를 타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함께 있을 때 지루하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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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


아이는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에 맞춰서 춤을 추는 걸 좋아한다. 베를린 필하모니커 발트뷔네 콘서트 영상을 보여준 다음부터였다. 쿵짝짝 쿵짝짝 리듬에 맞춰 앉았다 일어났다하며 빙글빙글 도는 게 무척 귀엽다.

남편은 아이와 놀 때 내가 재즈를 틀어놓는 걸 싫어한다. 예측할 수 없는 음을 아이가 듣는게 싫다고 한다. 슬픈 노래를 트는 것도 싫어한다. 아이에게 감정이 전이된다고 한다. 힙합도 싫어한다. 가사가 불경스럽다나. 그렇다고 메탈을 틀 수는 없으니 클래식으로 합의를 보기로 한다.

뽀로로 노래에 지친 내 귀는 누가 책임질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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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실격



요즘처럼 집중력이 떨어지고 잡생각이 많아지는 때에는
늘 불안불안하다.

어제도 멍청하게 거울을 보며 이를 닦고 있었다.
멀리서 ‘엄마 같이 화장실 들어가!’ 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쪼르르 들어온다.
개구지게 웃으면서 욕조로 들어간다.
욕조에 물기가 남아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이를 막지 않는다
아이가 첨벙첨벙 소리가 재미있는지 발을 동동 구른다.
위험한데, 저거 위험할 텐데… 알면서도 막지 않는다.
쾅 하는 소리가 들리고 아이가 자지러진다.
그때서야 현실로 돌아와보니 아이가 걷질 못한다.

오늘 진단을 받아보니 종아리뼈와 정강이뼈가 골절이다.
하루종일 동네 병원과 대학 병원을 왔다갔다하며 고생한 아이는
무던한 성격 탓인지 병원도 의사도 깁스도 모든 게 신기하기만 한 모양이다.
그 와중에 파란색 말고 초록색으로 감아달라고 한다.
“와! 다리가 엄청 단단해졌네! 그린 히어로네!” 하는 아빠의 말에 까르르 웃는다.

아이보다 내 행복을 우선시하겠다는 내 다짐이
이기적인 엄마가 되겠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그게 결국 같은 말이었나 싶어 어디 숨고만 싶다.

이런 날엔 엄마 실격 말고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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