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지면 남편은 한 솥씩 차를 끓인다. 메밀차, 보리차, 유자차, 한라봉차…

오늘은 일하는 내 책상 앞에 숭늉과 티스푼을 턱 하고 내려놓는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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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마음에 파도가 일어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오늘같은 날엔 바다에 가야 한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오프를 내고, 헤드폰만 가지고 보스턴 근처 해안가에 나갔다. 바다 가까이에 살아서 다행이다.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마음의 파도를 고스란히 느껴본다.

겨우 잔잔해진 물을 어떻게든 지키리라 그렇게도 다짐했는데, 작은 바람에 인 물결이 이렇게나 큰 파도가 되어 해안을 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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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소유의 종말


음악을 소유하지 않는 시대가 무르익었다. 오래 전부터 예측한 일이면서도 서운하다.

어려서부터 디지털 세상에 꽤 발빠르게 적응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트렌드에는 적응하기를 거부하고 싶다.

음악은 내 삶에 무척 중요한 존재다. 꽤 최근까지도 MP3 다운로드 서비스를 썼었다. 특정 시기에 들었던 음악을 기억하고 소유하고 싶어서다. 요즘은 스트리밍 재생리스트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지만 음악이 텍스트화된 기록들로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게 속상하다.

좋아요가 다운로드를 대체하게 되면서 좋은 음악의 무게도 줄어드는 느낌이다. 정말 고르고 골라서 내 취향에 맞는 음악을 소중하게 다운로드하고 음반을 샀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한 번 듣고 귀에 감기는 음악에 자주 좋아요를 누르게 된다. 그런 음악들에는 반드시 사용기한이 있다. 몇 달 뒤에 들으면 무심코 좋아요를 취소하게 되고 흔적 없이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요즘은 월별로 재생리스트를 만든다. 조금은 해결이 되는 느낌이지만 무의미한 숫자들과 함께 늘어나버리는 리스트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디지털 무소유주의자인 남편은 그게 요즘 음악 감상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순간적인 끌림으로 음악을 선택하고 지겨워지면 아무 미련없이 기억 저편으로 보내버리는 것. 그게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얄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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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어쩌면 이라는 단어가 싫어졌다

결국 하지도 않을 일이면서

불가능한 일도 아닌
그렇다고 현실도 아닌

무의미한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어쩌면이라는 단어가 아예 사라졌으면 한다

할 수 없다에 마침표를 찍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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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 see how it goes



아이가 부쩍 영어가 늘기 시작했다. 두돌 기점으로 언어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유치원에서 외국어를 습득하는 능력도 느는 모양이다.

하품을 하면서 “Yawn~~~” 이라는 영어 의성어를 쓰거나, “Excavator가 construction site 뚝딱뚝딱 공사하고 있어” 처럼 교포 말투를 구사하기도 한다.

“영어유치원 보내는 셈이네! 요즘 한국에선 애를 못 보내서 난리래!”라고 우스갯소리 하지만 실은 이럴 때마다 아이를 미국에서 키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나는 아이가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자란다는 게 무섭다. 아이가 형성해갈 다른 사고 체계와 문화적 토양이 부모 자식간의 거리감을 말하는 것 같아 속상하고,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느끼듯 이편도 저편도 아닌 것 같은 소속감의 혼란을 느낄까봐 걱정도 된다. 무엇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랄까봐 두렵다. 결국 이기적인 마음이다.

어서 한국에 돌아가자고 보채기에는 내 꿋꿋함도, 남편의 떳떳함도 지키고 싶기에 누굴 만나든 “Let’s see how it goes”를 말한다. 너무나 나답지 않은 말을 뻔뻔하게 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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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면 솔직한 마음을 보이게 된다.

나는 가끔은 그 점에 기대지만
대개는 술을 마시면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첫 직장에서 내가 있던 부서는 지금 생각하면 구식이었다. 새벽 두세시까지 술자리를 하다 아무도 없는 양재천을 건너 집에 들어가는 날이 많았으니까. 그땐 그게 사회라고, 커리어우먼이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너는 왜 안 취해? 빨리 더 마셔

따뜻한 줄 알았던 상사의 충혈된 눈이 기억난다.

멀쩡해보여서 열 받네?

주량이 자신의 무기였던 상사는 내 굴복을 원했다.

멀쩡한 게 아니었다. 정신을 놓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참았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술을 먹여 약점과 진심과 비밀을 알아내려고 한다. 맨 정신에는 마음을 움직일 힘도 없으면서. 그럴 용기와 언변도 없으면서. 그런 사람들을 나는 혐오한다.

다음날 아무일이 없었던 것처럼,
머리를 만지고 구두를 신고
안녕하십니까 밝게 웃으며 사무실에 들어섰던
그 날들이
한참 지난 지금에 와서야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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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 뭘까



오늘은 누가 날 좀 도와줬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인생에서 누가 날 도와주도록 허락해본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결국 내가 나를 돕지 못해서 하는 푸념이다.

자기를 잘 돌보는 사람이 부럽다.

나도 운동을 하면, 맛있는 것을 먹으면, 비싼 물건을 사면 힐링이 되는 사람이면 좋겠다.

못살게 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참한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무엇에 쫓기는지 모르겠다.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토들러와의 하루 때문이려나.

스스로에게 모질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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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 Ock, 적재, Charlie Hayden, Diana Krall, Lizzo



1. Sam Ock – I Still Want Your Love


여백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곡. 비워내서 더 애절한 곡이다. 한국계 미국인 아티스트 샘 옥은 다재다능한 아티스트다. 재즈, 팝, R&B를 넘나드는 자신의 장르를 개척했다고 생각한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직접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미친 재능도 감상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공연을 했다고 하는데 언젠가 꼭 실연을 보고싶다.


2. 적재 – Lullaby


가사에 매몰되기 싫어서 국내 발라드를 잘 듣지는 않지만 마음이 답답해 바늘로 쿡 찔러 일부러 눈물을 내고 싶은 날엔 적재, 폴킴, 이하이의 곡을 듣는다. 적재의 목소리에서는 절제된 슬픔이 느껴진다.

3. Charlie Hayden – Bittersweet



재즈는 나에게 우울한 음악이 아니다. 우울해지기 위한 음악도 아니다. 마음을 해방시키는 음악이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을 때 슬픈 재즈를 들으면 마음이 조금은 가볍게 떠오른다. 그 힘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을 때도 있다. 이 곡이 그렇다. 무겁게 내려앉은 찰리 헤이든의 베이스 위에 사뿐거리는 피아노의 선율이 한없이 가볍다. Bittersweet, 절묘한 제목이다.


4. Diana Krall – Just the way you are


다이애나 크롤은 재즈 피아노 연주도 훌륭하지만 성숙한 중저음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중후하고 텁텁한 보컬. 저렇게 나이들고 싶다…생각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외모까지

5. Lizzo -Juice


팝 가수 중에서는 리조를 정말 좋아한다. 특히 그녀가 매 공연마다 보여주는 body positivity의 메시지는 나를 포함한 전세계 여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컬은 말할 것도 없고 퍼포먼스할 때의 모습이 정말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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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



한쪽 매듭이 풀린 실이 자꾸 꼬인다
잡아당길수록 더 엉뚱하게 꼬인다

묶여있는 반대쪽 끝을 풀어보려 한다

왜 그렇게 단단히도 묶었는지 내 무딘 손톱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다

가위를 든다
그리고
이내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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